(사)경제사회연구원

커뮤니티

HOME > 커뮤니티 > 블로그

블로그

이한우의 ‘시사와 역사로 주역을 읽다 以事讀易’ 〈1〉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 관리자
  • 19.10.21
  • 24

출처: 월간조선 2019년 10월호

http://m.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1910100061





2019년 9월 2일 기자간담회 형식의 ‘셀프청문회’에 나선 조국 법무부 장관.
《주역》으로 보면 그는 조선 정조때의 총신 홍국영·정동준과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周易》은 점서가 아니라 현실의 흐름을 읽는 地圖다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 8월 하순은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이자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지낸 조국(曺國) 법무부 장관의 사모펀드 투자와 가족이 운영하는 학원의 불투명한 재무관계, 그리고 특히 딸의 각급 학교 부정입학 논란 및 상식에서 벗어난 장학금 수령으로 더욱 뜨거웠다.
 
  그가 문제가 된 지점을 좀 더 현실 정치적인 맥락에서 보자. 과거 그가 이런저런 사회단체 활동을 하다가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을 도와 북토크 패널로 참여하고,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을 지내는 등 문재인의 ‘두뇌’로 활약하며 ‘최측근’의 한 명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문재인 정권 출범 후 민정수석 발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법무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기려는 과정에서 청문회라는 절차 때문에 그동안 숨겨져 있던 그의 음습한 과거 행적들이 한꺼번에 세상에 드러났다.
 
  그 충격은 참으로 컸다. 입만 열면 촛불혁명, 촛불정권을 내세웠으나 지난 8월 28일에는 서울대 총학생회가 공식적으로 조국 후보자의 사퇴를 요구하는 촛불집회를 열었다. 그에 앞서 서울대와 고려대는 각각 자발적 형태의 촛불집회를 가진 바 있다.
 
  본인은 자신의 행적을 개혁을 향한 사회 정치적 참여라고 항변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명분을 내걸고 이렇다 할 공적도 없이 무임승차해 권력을 휘두르려 하다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비명횡사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이런 경우 그의 정치적 행로를 《주역(周易)》으로 짚어낼 수 있을까? 물론이다. 그러나 점을 쳐서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그와 비슷한 인물을 찾아내고, 그가 어떤 삶을 살아갔으며, 또한 그의 행적은 결국 《주역》의 어떤 괘 속의 어떤 효(爻)에 근접한지 확인하는 방식을 통해서다. 그런 점에서 《주역》은 역사적 지혜의 온축이기도 하다.
 
  한 달 가까이 한국 정치판에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킨 조국 법무부 장관의 경우 역사 속에서 비슷한 인물을 찾아내는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조선 정조(正祖) 때의 두 귀근(貴近) 홍국영(洪國榮・1748~1781)과 정동준(鄭東浚・1753~1795)이 있기 때문이다.
 
 
  홍국영이 속한 損卦로 보는 조국
 
  손괘(損卦, ☶☱)의 맨 아래 첫 양효에 대해 공자는 “일을 마쳤으면 빨리 떠나가야 하는 것[已事遄往]은 (무엇보다) 윗사람과 뜻을 합치는 것[合志]이 최상이기 때문이다”라고 풀었다. 주공(周公)은 효사(爻辭)에서 “일을 마쳤으면 빨리 떠나가야 허물이 없으니 짐작하여 덜어내야 한다[酌損之]”고 했는데, 공자는 그중에서 앞부분에 대해서만 풀이를 했다.
 
  《주역》에는 모두 64개의 괘(卦)가 있다. 그중에 건괘(乾卦, ☰☰)와 곤괘(坤卦, ☷☷)는 각각 모두 양효 6개와 음효 6개로만 이뤄진 효로서 현실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음양 원리로서 이상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머지 62개의 괘가 바로 현실 속의 상황을 나타내는 괘다. 대체로 괘는 상황, 즉 일의 형세[事勢=命]를 나타내고 그 안에 있는 6개의 효는 각기 그 상황 속에서 취해야 할 일의 이치[事理=禮]를 나타낸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치를 따를 때 길하고 따르지 않을 때 흉하다. 이걸 굳이 점을 쳐야 할 것은 아니다. 제 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손괘의 맨 아래에 있는 양효인 초구(初九)는 양강의 자질로 양의 자리에 있으니 자리가 바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순서상으로 맨 밑에서부터 맨 위에까지 여섯 자리는 각각 양, 음, 양, 음, 양, 음의 자리다. 홀수는 양, 짝수는 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의 자리에 양효가 있으면 그것을 정(正·바르다)이라고 하고 음효가 있으면 부정(不正·바르지 않다)이라고 한다. 음의 자리에는 그와 반대다. 손괘의 초구는 따라서 정(正)이다.
 
  효끼리의 관계를 보는 데 있어 그다음으로는 친밀함[比]을 보는데, 위아래에 바로 붙어 있는 효와 서로 음양이 다르면 친밀하고 서로 양양이나 음음으로 같으면 친밀함이 없다[無比]고 한다. 손괘 초구의 경우 맨 아래에 있다 보니 바로 위에 있는 효하고만 친밀함을 따지는데, 같은 양효라 무비(無比)다.
 
  효끼리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호응관계[應]인데 1과 4, 2와 5, 3과 6이 서로 음양이 교차하면 호응이 있다[有應]고 하고, 같은 양양이나 음음일 경우 호응이 없다[無應]고 한다. 손괘 초구의 경우 음효인 육사와 호응이 있다. 응(應)이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은 정(正)이며 비(比)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뛰어남을 자랑하지 않고”
 
  그러면 손괘 초구의 경우 양효로 양의 자리에 있으니 자리가 바르다. 그런데 양의 자리는 모두 3개가 있는데 가장 낮은 자리에 있다.
 
  조국 장관의 경우 학자로 있을 때는 양의 자리로 가장 낮은 자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때에는 있어야 할 자리라 바른 것이다. 이럴 때 바로 위의 구이와는 친하지 않으며[無比] 부드럽고 고분고분한 자질의 육사와는 호응하고 있다[有應].
 
  풀이하자면 주변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그와 친밀하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육사, 즉 재상이나 대선 후보군 사람들이 그에게 호응하는 형세다. 실제로 그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자 유시민, 이재명 경기지사, 박원순 서울시장 등이 노골적으로 그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대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제 손괘의 전체 모습을 보자. 앞서 본 바와 같이 덜어냄 혹은 덜어줌[損]이란 “아래를 덜어 위를 더해주는 것”이며 또한 “자신의 굳셈을 덜어 부드러움에 보탬[益]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초구는 자신의 굳셈을 덜어내 육사의 부드러움을 더해주어야 한다. 일을 마쳤다는 것은 바로 자신을 덜어내 육사를 더해주는 일을 가리킨다.
 
  그런데 왜 일을 마쳤으면 ‘빨리 떠나가야 허물이 없으니’라고 한 것일까? 자신이 남에게 베풀었다고 해서 공치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아래에 있는 자가 윗사람을 위해 공로를 세웠다고 해서 공치사를 하게 되면 허물이 있을 수밖에 없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편에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포부를 말해보라”고 했을 때 수제자 안회(顔回)가 한 답이 바로 이 점을 말한 것이다.
 
  “저의 바람은 자신의 뛰어남을 자랑하지 않고[無伐善]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無施勞].”
 
 
  주군까지 곤경에 빠뜨린 조국
 
  ‘빨리 떠나가라’는 것은 미련을 두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면 효사에서 ‘짐작하여 덜어내야 한다[酌損之]’는 것은 무슨 뜻인가? 앞서 본 대로 작(酌)이란 때와 상황을 잘 살펴 시중하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육사는 지위는 높지만 부드럽고 고분고분한 자질이라 아무래도 초구의 굳센 자질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초구가 조금 공로가 있다고 해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일의 이치[事理]와 일의 형세[事勢]를 잘 감안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공자가 말한 ‘윗사람과 뜻을 합치는 것[合志]이 최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저절로 풀이가 된 셈이다.
 
  그러나 조국은 자신을 덜어내기는커녕 자신을 더하려다가 본인은 물론이고 자신을 발탁해준 주군까지 곤경에 빠트렸다. 윗사람과 뜻을 합치려 한 것인지 의문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세손으로 있던 정조를 도와 즉위를 도운 홍국영이 바로 손괘 초구의 의미를 모르고 자신의 공로를 믿고 빨리 떠나지 않아 파국에 이른 전형적인 사례다. 그의 삶을 간략히 살펴보자.
 
 
  三不必知說
 
  영조가 대리청정 의사를 처음으로 밝힌 것은 영조 51년(1775) 11월 20일 경연에서였다. 그때는 경연 때마다 동궁(세손)을 참석시켰기 때문에 그 자리에는 정조도 있었다. 그 밖에 돈녕부 영사 김양택, 영의정 한익모, 중추부 판사 이은, 좌의정 홍인한 등 전현직 정승들이 배석했다.
 
  이날 경연에서 82세의 영조는 대리청정 의사를 밝힌다.
 
  “국사(國事)를 생각하느라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지가 오래됐다. 어린 세손이 노론(老論)을 알겠는가? 소론(少論)을 알겠는가? 남인(南人)을 알겠는가? 소북(小北)을 알겠는가? 국사를 알겠는가? 조사(朝事·조정의 일)를 알겠는가? 병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지를 알겠으며, 이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지를 알겠는가? 이와 같은 형편이니 종사(宗社)를 어디에 두겠는가? 나는 어린 세손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알게 하고 싶으며, 나는 그것을 보고 싶다.”
 
  그러면서 전위(傳位)를 생각했으나 세손이 놀랄 수 있기 때문에 과도적 단계로 대리청정을 시키려 한다고 덧붙였다. 실은 때늦은 결심이었다.
 
  그러나 영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좌의정 홍인한이 말했다.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더욱이 조사까지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정면에서 동궁을 깔아뭉개는 발언이었다. 이를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 즉 알 필요가 없는 세 가지라고 이른다.
 
  홍인한으로서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정후겸도 가담했다. 반면 세손도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세손은 노골적으로 척리들을 배척한다는 뜻을 밝히며 맞섰다.
 
  세손으로서는 눈썹이 타들어 가는 초미지급(焦眉之急)의 상황이었다. 12월 3일 세손의 측근인 서명선이 운명을 가르게 되는 상소를 올린다. 홍인한이 말한 삼불필지설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원래 이 상소는 세손이 직접 올리려다가 홍국영이 나서서 말리며 서명선으로 하여금 대신 올리게 한 것이었다. 세손이 직접 올릴 경우 위험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에 서명선이 홍국영·정민시와 의논한 끝에 목숨을 건 상소를 올렸다. 만일 이 상소를 영조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을 경우 세손의 자리 또한 위태로울 수 있었다. 워낙 의심이 많고 변덕이 심한데다가 나이도 너무 많은 영조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영조는 서명선의 손, 아니 세손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고 바로 다음 날 영의정 한익모와 좌의정 홍인한을 삭직한다. 이로써 세손의 지위는 튼튼해졌고 본격적인 대리청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홍국영의 벼락출세
 
  외형적으로는 서명선이 주도적 역할을 했지만 이 모든 계획의 기획자는 다름 아닌 홍국영이었다. 정조가 훗날 “외척들의 모함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잃지 말고 끝까지 대항하도록 조언하면서 몸을 던진 이는 홍국영 한 사람뿐이었다”고 회고한 것도 이때 홍국영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이듬해 2월 24일 홍국영은 사인(舍人)으로 발령을 받는다. 사인은 정4품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원래는 의정부의 심부름을 하는 자리다. 오늘날로 치자면 국무총리 비서실장에 해당한다. 이 경우는 굳이 말하자면 세손 비서실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날 서명선은 이조판서로, 홍국영은 훈련원 정(正)으로 발령을 받는다. 훈련원 정은 정3품 당하관에 해당하기 때문에 하루 만에 품계가 두 단계나 뛰었다. 세손의 총애는 그만큼 컸다.
 
  의기투합(意氣投合), 정조 즉위 초 정조와 홍국영의 관계는 이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패기에 찬 홍국영은 적어도 이때만은 진심으로 정조를 보필했다. 홍국영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閑中錄)》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동궁께서는 나이도 서로 비슷하고 얼굴도 잘생기고 눈치 빠르고 민첩하니, 세상이 어지러웠던 때를 당하여 한 번 보고 크게 좋아하셔서 총애가 깊으셨다. 처음에는 요 어린놈이 간사한 꾀를 내어 동궁께 곧은 충고를 하는 척했지만 실은 다 일 듣기 좋은 말이라… 한번 국영이 들어오면 외간의 일들을 여쭙지 않는 일이 없고, 전하지 않는 말이 없으니 동궁께서 신기하고 귀하게 여기셨다.〉
 
  정조는 즉위 나흘째인 3월 13일 홍국영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한다.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이라는 의미보다는 왕명(王命)을 공식적으로 출납하는 자리에 오른 데 의미가 더 컸다. 게다가 홍국영은 단순한 왕명출납 이상의 직무를 수행했다. 왕명생산, 즉 정조의 1인 싱크탱크이자 책사(策士)로서 정국(政局)의 밑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정조 즉위년 3월 13일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된 홍국영은 6월 1일 이조참의로 자리를 옮긴다. 품계는 같은 정3품 당상이지만 인사를 다루는 핵심요직을 맡은 것이다. 7월 6일 홍국영은 도승지에 오른다. 이때 홍국영의 나이는 29세였다.
 
  영조 말기에는 주요 대신들이 정후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면, 정조 초에는 홍국영의 눈치를 살폈다. 홍국영이 도승지에 임명된 바로 다음 날 영의정 김양택은 ‘나이가 젊고 총명하니 홍국영을 비변사(備邊司) 부제조로 임명해야 한다’는 의견을 낸다. 이에 정조는 ‘아직은 너무 빠르다’며 거부했다. 이미 이때도 홍국영을 음해하는 각종 이야기가 정조의 귀에 들어가고 있었다.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權奸으로 전락한 功臣
 
홍국영·정동준 등 ‘문제적 인물’을 중용했던 정조.
  8월 18일 홍국영은 승문원 부제조로 옮긴다. 내의원의 총책임을 맡기기 위한 것이었다. 누구보다 신변안전에 신경을 썼던 정조이기에 홍국영의 승문원 부제조 임명은 무한총애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9월 25일 인재양성 기관으로 규장각을 세운 정조는 홍국영을 규장각 직제학으로 임명했다. 제학 바로 아래 자리였다. 또 10월 19일에는 군무를 관장하는 찰리사로 임명했다. 이 모든 게 겸직이었다. 한 달 후인 11월 19일에는 수어사도 겸직게 했다. 그리고 다음 날 홍국영과 김종수를 비변사 제조로 임명했다.
 
  이듬해 5월 27일 홍국영은 경호실장에 해당하는 금위대장까지 겸한다. 그리고 다음 날 김종수는 우의정에 오르게 된다. 그해 8월 반역모의가 생겨나 홍국영은 이를 제압하는 공을 세운다. 그리고 10월 17일 홍국영은 종2품직 홍문관 제학에 제수된다. 이후에도 홍국영은 훈련대장을 거쳐 정조 2년 3월 25일 규장각 제학에 오른다. 문무(文武)의 요직이라는 요직은 자유자재로 맡았다. 당시 홍국영에 대한 실록은 대단히 비판적이다. “이때 홍국영의 방자함이 날로 극심하여 온 조정이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즉위에 공이 있다고 해서 이처럼 특진에 특진을 거듭하게 한 것은 정조의 인사처리가 그만큼 미숙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것은 홍국영을 위해서도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었다. 인재를 키우는 길이 아니라 죽이는 길을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정조 자신이었다.
 
  권력을 맛본 30대 초반의 홍국영은 어느새 ‘일등 공신’에서 권간(權奸)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정조 2년 홍국영은 정조에게 소생이 아직 없다는 점에 착안해 13세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들여보내 정조와 처남 매부 사이가 된다.
 
  그러나 하늘은 홍국영의 끝을 모르는 권력욕을 그냥 둘 수 없었던 것 같다. 정조 3년 5월 7일 원빈 홍씨는 14세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뜬다. 홍국영은 왕비의 상례(喪禮)에 준하여 동생의 상을 치렀다. 참람한 행위였다.
 
  〈이휘지가 표문(表文)을 짓고, 황경원이 지장(誌狀)을 짓고, 송덕상이 지명(誌銘)을 짓고, 채제공이 애책(哀冊)을 짓고, 서명선이 시책(諡冊)을 지었다.〉
 
  국왕의 상을 당했을 때나 동원될 만한 당대의 명유(名儒)들이 총동원된 것이다. 그러고 9월 26일 홍국영은 도승지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정조는 즉각 수리했다. 실은 정조가 사직도록 명을 내린 것이다. 갑자기 이렇게 정조의 태도가 바뀐 데 대해서는 실록이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홍국영의 몰락
 
  〈그 누이가 빈(嬪)이 되고서는 더욱 방자하고 무도하여 곤전(坤殿・중전 효의정후 김씨)의 허물을 지적하여 함부로 몰아세우고 협박하는 것이 그지없었으나, 임금이 참고 말하지 않았다. 그 누이가 죽고서는 원(園)을 봉(封)하고 혼궁(魂宮)을 두었고 점점 국권을 옮길 생각을 품어 앞장서 말하기를, ‘저사(儲嗣)를 넓히는 일은 다시 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역적 은언군 이인(李秵・철종의 할아버지)의 아들 상계군 이담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아 그 군호(君號)를 고쳐 완풍(完豊)이라 하고 늘 내 생질이라 불렀다. 완이라는 것은 국성(國姓)의 본관인 완산(完山・전주)을 뜻하고, 풍이라는 것은 제 성의 본관인 풍산(豊山)을 가리킨 것이다.
 
  가리켜 견주는 것이 매우 도리에 어그러지므로 듣는 자가 뼛골이 오싹했으나, 큰 위세에 눌려 입을 다물고 감히 성내지 못했다. 또 적신(賊臣) 송덕상(宋德相)을 추겨 행색이 어떠하고 도리가 어떠한 자를 임금에게 권하게 했는데, 바로 이담이다. 그래서 역적의 모의가 날로 빨라지고 재앙의 시기가 날로 다가오니, 임금이 과단(果斷)을 결심했으나 오히려 끝내 보전하려 하고 또 그 헤아리기 어려운 짓을 염려하여 밖에 선포하여 보이지 않고 조용히 함께 말하여 그 죄를 낱낱이 들어서 풍자하여 떠나게 했다.〉
 
  정조는 홍국영을 살리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옛 동지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다. 이날 송덕상,김종후(김종수의 형) 등이 나서 “사직을 만류해야 한다”고 하자, 정조는 “이렇게 해야만 끝내 홍국영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한다. 이후 연말까지 홍국영 세력에 대한 숙청작업이 철저하게 진행됐다. 대신 겨우 목숨을 구한 홍국영은 도성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명을 받았고, 재산도 몰수당했다.
 
  모든 관직을 빼앗긴 홍국영을 정조는 이틀 후 인정전으로 불러 작별인사를 한다. 할 말이 많았지만 모든 것을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서 홍국영은 “자신은 정민시와 형제 같은 정을 갖고 있으니 그를 끝까지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한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강원도 강릉 해안가에 거처를 마련한 홍국영은 술로 날을 지새우다가 1781년(정조 5년) 4월 사망했다. 33세였다.
 
 
  정동준이 속한 坎卦로 보는 조국
 
  감괘(坎卦, ☵☵)의 밑에서 세 번째 음효에 대해 공자는 “오고 가면서 빠지고 또 빠지니 끝내는 공이 없다”고 풀었다. 주공의 효사부터 보자. “오고 가면서 빠지고 또 빠지며 위험한데 또 의지하다가 깊은 구덩이로 들어가니 쓰지 말라.”
 
  육삼은 자리도 바르지 않고[不正] 중도를 지나쳤다[不中]. 중도란 하괘의 가운데인 2효와 상괘의 가운데인 5효를 말한다. 자질 또한 음유(陰柔)이니 한마디로 처신하는 바가 좋지 않다. 초육과 여러 모로 닮았다. 그래서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위험하게 처신하니 ‘오고 가면서 빠지고 또 빠지며 위험한데’라고 한 것이고, 그 와중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보려 하지 않고 남에게 기대려 하니 ‘또 의지하다가 깊은 구덩이로 들어가니’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도리는 써서는 안 되고 당연히 이에 해당하는 인물도 써서는 안 된다. 물용(勿用)은 그 점을 강조한 것이다. 물(勿)는 강한 부정어다.
 
  여기에 해당하는 인물은 아무래도 위험한 구덩이에 빠진 것과 같은 시대에 많이 출현하기 마련이다. 정조 때 정동준이란 인물이 정확히 여기에 해당한다.
 
 
  정조가 총애한 정동준
 
  정조는 1780년(정조 4년) 정동준을 선발해 규장각 대교(정8품)로 임명했다. 이듬해 2월 정동준은 이시수・서용보 등과 함께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선발됐다. 이미 이때 정동준은 정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에 정조 6년 2월 정조가 정동준을 이조좌랑으로 특진시키자 정동준은 끝까지 사직의 뜻을 밝혔다. 이에 정조는 정동준을 과천현감으로 보임했다. 1년 후 의정부 사인(舍人・오늘날의 국무총리 비서실장)에 임명된 정동준은 한 달 후 규장각 직각으로 자리를 옮긴다. 다시 규장각신이 된 것이다. 직각은 대략 5품직에 해당한다.
 
  정조 9년과 10년에도 이조참의에 제수되지만 이때도 정동준은 사양하다가 수원부사로 보임된다. 정조 11년 6월 문제의 이조참의는 이시수가 차지하고 정동준은 이때 대사간으로 임명된다. 1년 후 전라도관찰사에 보임되나 사직을 청해 받아들여졌고, 정조 13년 1월 12일에 다시 경상도관찰사로 보임되나 역시 나갈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정조는 “정동준을 삭탈관작하고 영원히 의망(후보군)에서 빼버리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었고 이듬해(1790) 정동준은 승지가 되어 정조를 측근에서 보좌하게 된다. 정조는 정동준의 문장을 좋아했다. 그리고 2년 후 정동준은 규장각으로 복귀한다.
 
  정동준이 정조의 복심으로 활동하게 되는 정조 17년(1793), 정조 18년(1794)의 기록은 실록에 하나도 없다. 정확히 그가 무슨 활동을 어떻게 하다가 정조와 대립하던 노론벽파(老論辟派)와 갈등을 빚었는지에 관한 정보가 고스란히 빠져 있는 셈이다. 정동준은 소론계 인사다.
 
  다행히 정약용의 《목민심서》 중 정약용이 미리 쓴 자신의 묘지명에 정동준 관련 내용이 나온다. 이때는 정약용이 홍문관 관리로 있을 때였다. 먼저 정약용이 본 정동준의 당시 행태다.
 
 
  정약용이 본 정동준
 
  〈이 무렵 정동준이 병이 났다는 핑계로 집에서 지내며 음흉하게 조정의 권한을 잡아보려고 사방의 뇌물을 긁어모으고 고관대작들이 밤마다 백화당에 모여 잔치를 베풀고 있자, 안팎으로 눈을 찌푸리게 됐다.
 
  내가 늘 정동준을 공격하고 싶어 상소문을 써놓기를 “규장각을 설치한 것은 임금께서 옛날의 아름다움을 이어받고 문치(文治)를 펴나가게 하자는 것이며 또 원대한 경륜을 계획하려 함입니다. 무릇 신하로 있는 사람으로서 누가 그 일을 흠앙치 않으리오. 그러나 그 인원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더러는 적합지 못한 사람이 뽑혀서 임금의 총애를 분수 외로 받게 되자 교만심과 사치하는 마음이 움터 비방의 소리가 일어나게 됐으니 각신(閣臣)인 정동준과 같은 사람은 병을 핑계 삼아 집 안에 머무르면서 아침저녁으로 공부하고 몸 닦는 일도 하지 않으니 그 일을 괴이하게 여겨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그의 저택은 규제를 벗어나 지나가는 사람마다 손가락질을 하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각신으로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좋은 소식이 될 게 없으리라 싶어 걱정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임금께서는 조금씩 억제해주시고 분수를 지킬 수 있게 해주신다면 조정이나 조정 밖의 의심을 푸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행복일 것입니다”라고 적어놓았는데, 갑인년(33세, 1794년) 겨울에 두 번째로 옥당(홍문관)에 들어갔고 곧 자리가 바뀌는 바람에 상소를 올리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을묘년(1795) 초에 정동준이 일이 발각되어 자살해버려 마침내 그만두었다.〉
 
  정조 17년과 18년, 2년 동안 정동준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한 것일까? 정약용의 글이나 다음에 보게 될 권유의 상소 등을 통해 추론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측근으로서의 횡포와 권력남용이었다. 정동준은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게시판 목록
[이한우의 간신열전] [9] 지록위마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아침을 열며] 일본화에 대한 오해 - 김경록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
[신범철 칼럼] 외교 이렇게 해선 안 된다 -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
[금요광장] 성냥팔이 소녀가 된 사람들 - 전지현 변호사
[이한우의 간신열전] [8] 권력자 주변의 方士 무리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김경록의 욜로은퇴] 사람이 호랑이보다 오래 사는 이유 - 김경록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
[교수의 서재] 나에게 책은 소개팅이다 - 윤희숙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문정부 안보외교 전면 전환 급하다 -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
[이한우의 간신열전] [7] 말재주 부리는 者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한반도포커스-신범철] 지소미아 연장 이후 -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
우리의 세금으로 굴러가는 건강보험 제도, 사각지대에서 악용되고 있다면? - 박성민 변호사
[이한우의 간신열전] [6] 여우와 쥐새끼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시평>초당적 ‘가짜뉴스 대책’ 화급하다 - 양승목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한우의 ‘시사와 역사로 주역을 읽다 以事讀易’ 〈2〉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김경록의 욜로은퇴] 아내의 건강 레시피 - 김경록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
[朝鮮칼럼 The Column ] 국민 호구(虎口) 시대 -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
[이한우의 간신열전] [5] 간신에게 대처하는 방법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유튜브 '노란 딱지' 무엇이 문제인가 - 박성민 변호사 인터뷰
[금요광장] 온통 입만 살아있는 사회 - 전지현 변호사
[이한우의 간신열전] [4] 봉영상의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게시물 검색